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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 이질적인 것들의 동시적 공존

by mommics 2022. 5. 20.

1. 미스터리한 다()중첩의 현실 속에서 부유하는 청춘들의 의미 찾기!

"자연의 도덕이란 동시 존재 같은 거죠.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어요,
나는 파주에도 있고 반포에도 있으며,
서울에도 있지만 아프리카에도 있죠" 
“저한테 세상은 수수께끼 같아요”

- 영화 버닝 중 대사 -

 

영화 버닝 포스터

 

2. 영화 버닝에서 <양자물리학>을 떠올리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2018)은 여느 이창동 감독의 영화보다도 상당히 다르게 보일 만큼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큰 차이로 다가온 영화였습니다. 영화 버닝은 치열하면서도 신비로우며 몽롱한 꿈과 같습니다.

 

이 영화를 아주 단순하게만 보면 매우 단순한 영화가 됩니다. 하지만 또 복잡하게 보면 상당히 복잡하게 보이는 그런 야릇한 느낌의 영화인 점이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뜬금없이 현대 과학의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다른 한국영화 양자물리학(2019)과는 느낌이 완전히 다른 영화입니다. 혹시 이창동 감독의 버닝영화를 보고서 저처럼 <양자물리학>을 떠올린 분도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양자물리학에는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나오는데, 버닝영화에도 미스테리한 고양이가 나옵니다.

 

앞서 말했듯 영화를 아주 단순하게만 본다면 매우 단순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흙수저 청춘 남녀 2명과 금수저 남1명이 서로 얽힌 관계에서 금수저 남자가 흙수저 여성에 관심하다가 어느날 여자가 실종이 되자 결국 흙수저 남자가 마지막에 금수저 남자한테 복수를 가한다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이게 전부입니다. 정말 단순한 내용이죠?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 영화는 그야말로 여러 가지로 읽히게 되는 장치들이 많아서 여전히 모호투성이로 남게 됩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개운치 않은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영화 자체가 다층적인 <모호성>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창동 감독으로선 우리가 사는 현실(reality) 자체가 본래적으로 지극히 모호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영화는 등장인물 간의 얽혀 있는 내러티브를 결말에 가서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금수저 남자가 여자를 정말 죽였는지 어땠는지는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했던 여주인공의 대사를 상가해보면 스스로 사라진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만큼 여러 가능성들을 암시할 따름입니다.

 

빚이 많았던 흙수저인 여주인공으로선 정말 세상에서 사라지길 원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영화는 다른 한편에선 마치 금수저인 남자한테 희생 제물로 죽임을 당한 것처럼 암시되기도 합니다. 결국 진실은 항상 저 너머에 있다는.

 

2. <동시 존재>의 현실, 내러티브 및 해석의 중첩

 

그러나 이 영화 버닝은 이에 대해서도 조금은 다른 목소리를 들려준다. 우리가 종종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고 하지만, 진실은 저 너머가 아닌 항상 <지금 여기>에 있어 왔고, 다만 그것들이 항상 <동시 존재>로 있어왔기 때문에 모호투성이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실 극중에 나온 몇 가지 복선 장치들도 이해를 명료하게 해주는 데에 그리 큰 도움이 안되는데, 그 이유는 영화상의 모든 단서들이 죄다 <중첩>된 의미로서 읽히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양자물리학의 그 유명한 <양자 중첩>(Quantum superposition) 현상처럼 말입니다.

 

영화의 등장하는 고양이도 그렇고 우물도 그렇고 손목시계도 그렇습니다. 영화를 통해 목격하게 되는 것들은 모호투성이의 흐릿한 진실이 남겨놓은 자취들 및 흔적들 밖에 없습니다. 마치 광자(photon)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통과하여 최종 벽에다 자신의 흔적만을 남겨놓은 것과도 유사합니다.

 

이것은 양자물리학사의 유명한 <이중 슬릿>(double-slit) 실험이죠. 어느 문으로 통과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극 중에서 여자는 스스로 사라졌다고도 볼 수 있고 남자가 여자를 죽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단서와 복선들이 중첩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이렇게 보면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면 저렇게 보입니다. 이제 스토리를 조금 더 풀어서 상세히 말해보겠습니다.

 

영화 버닝의 주요인물(왼쪽부터 종수, 해미, 벤)

주인공 남자 종수는 우연히 어릴적 기억이 흐릿했던 친구인 해미를 만납니다. 둘 다 가난한 청춘들인데, 해미는 판토마임을 좋아하며 다소 자유로움과 몽상가적인 삶을 추구하는 점도 있는데 반해, 종수는 소설가를 희망하지만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갑니다. 종수의 아버지는 홧김에 폭력을 질러 재판 중에 있고, 어머니는 집을 나간지 오래입니다.

 

종수의 집은 북한 대남방송이 들리는 파주에 있으며 남북한의 상반된 현실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종수는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지만 현실을 아예 벗어나고자 하는 해미와 달리 비천한 현실의 삶을 나름대로 잘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마침 그동안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가겠다고 했던 해미는 자기가 없는 동안 집에 고양이한테 밥을 줘야 한다면서 종수를 남산 밑 북향의 자기 방으로 끌어들입니다. 이를 수락하지만 종수는 해미의 고양이(보일이)의 흔적만 봤을 뿐 정작 실제 고양이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귀국한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이라는 남자를 소개하면서 이 3명은 묘한 관계를 형성합니다.

 

벤은 비싼 포르쉐를 몰고 화려한 저택에 살며 노는 일이 하는 일인 독신남으로, 종수는 그를 그레이트(위대한) 개츠비로 봅니다. 개츠비는 부도덕한 사업의 부유층 인물로 사람 만나는 파티를 좋아합니다. 또한 개츠비도 죽듯이 이는 벤의 죽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가난한 청춘들인 종수와 해미의 입장에서 보면, 매끈한 피부와 귀티나는 벤이라는 사람은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는 벤의 입장에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자신과 다른 세계의 해미와 종수를 자기 공간으로 끌어들입니다.

 

다만 벤은 철저히 사람들을 재미(fun)로서만 대합니다. 해미 역시 흥미로운 존재로 여기며 가까이 할 뿐입니다.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는 벤으로서는 눈물 많은 해미가 자신의 흥미를 자극시킨 것은 물론이고 소설 지망생의 종수의 입에서도 윌리엄 포크너의 문학 얘기가 나오기도 해서 함께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 벤에게는 흥미꺼리 이상의 의미는 못됩니다.

 

사회학적 계급으로 보면 종수와 벤의 경우 그 이질성이 분명하게 엿보이지만, 양자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흐려주는 인물이 해미입니다. <리틀 헝거>(little hunger, 생물학적으로 배고픈자)이자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 삶의 의미가 허기진 자)인 해미는 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진 않는데 반해, 종수는 벤에게 다소 경계를 보입니다.

 

어느날 종수가 사는 파주 동네 집으로 벤과 해미가 포르쉐를 타고 들르는데, 이날 해미는 오늘이 가장 최고의 날이라면서 노을을 보며 자유로운 새로 날아가고 싶어하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벤은 종수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도덕성의 균형을 위해 재미로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불법을 저지르는데 마침 종수가 사는 가까운 데를 봐둔 데가 있다는 말을 남깁니다. 그런데 정작 그날 이후로 해미 또한 행방불명이 되고 맙니다.

 

처음에 종수는 벤이 말한 비닐하우스를 정말 비닐하우스로만 알아듣고(아마도 종수는 어릴 적에 비닐하우스를 태운 적이 있는 듯) 근처에 태워진 비닐하우스가 없는지 동네방네 점검하며 다녔었으나 그것이 정작 해미를 가리킨 메타포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품게 됩니다.

 

그리고서 종수는 벤 주변의 여성과 사람들을 보며 특히 해미에게 준 손목시계와 해미의 고양이로 추측해버린 벤의 집에 있던 고양이 등 이러한 점들을 통해 결국 벤이 해미를 죽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더 이상 해미에 대한 궁금증보다 이제는 벤을 처단할 계획을 세우게 되고, 결국 종수는 벤을 칼로 죽이고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 버닝은 현실의 청춘들이 살아가는 계급들 간의 갈등이나 적대 관계를 말한 것일까요? 어떤 면은 그렇게 보이면서도 영화는 또 한편으로 그렇게 읽히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우리의 현실이 온갖 이질적인 것들의 동시적 공존과 온갖 중첩되는 메타포로 가득 찬 세상이라는 것.. 그 속에서 저마다의 의미 찾기를 보여줄 뿐임을 말합니다.

 

3. 자연의 도덕, 이질적인 것들의 동시적 공존의 현실

 

이 영화의 제목인 버닝(Burning)은 제물을 태운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요리를 먹는 재미를 위한 제물로 여기는 벤은 정말 해미를 비닐하우스 태우듯이 자신의 요리 제물로 삼은 것일까요? 그래서 벤은 해미를 저수지에 빠트린 것일까요? 하지만 이 영화는 벤이 직접적으로 살인을 했다는 점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는 종수의 살인을 보여줍니다. 종수야말로 벤을 태우는 제물로 삼습니다. 그것은 해미에 대한 복수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소설을 쓰고자 함에 있어서의 제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해미가 누구한테 죽임을 당했다기보다 그 스스로가 사라진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가요? 해미는 오래전부터 가족과의 인연도 끊었었고, 주변에 친구도 없으며, 빚에 시달려 살면서 애초부터 현실을 벗어나고파 했던 몽상가였습니다. 해미 언니의 얘기에 따르면, 해미는 어릴 적부터 없는 이야기도 잘 지어낼 줄 안다고 했습니다.

 

해미가 좋아한 판토마임을 한 번 떠올려보십시오. 판토마임은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 존제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몸짓 활동인데, 마치 해미의 삶 자체도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해미야말로 두 남자에게서도 없이 존재하고자 스스로를 제물로 삼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다층적이며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확정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실재(reality)의 실상들은 여전히 가려져 있으며, 같은 흔적의 단서를 놓고서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저마다 달라지고 달리 해석되며 달리 행위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정말 온갖 아이러니로 가득차 있는 수수께끼 같은 세상.

 

우물의 진실 역시 그렇습니다. 어릴 적 일이라 종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해미는 자신이 7살 때 우물에 빠졌었고 그때 당시 종수가 자기가 우물에 빠진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구제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해미의 가족들은 우물이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해미가 어릴 때 그런 엄청난 사건을 당했다면 가족들이 모를 리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뒤늦게 연락되어 만난 종수의 어머니는 당시 동네에 마른 우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정말 누구 말이 맞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야말로 <상반된 현실의 공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알고 보면 이 영화 버닝 전체가 이런 식입니다. 상반된 현실들의 동시적 공존... 남북한 대치 상황의 공존지인 파주, 낡은 농촌집에 주차한 외제 포르쉐, 소똥 냄새와 고급 와인이 함께 어우러진 자리, 극중에 나온 고양이는 정말 해미의 고양이일까요?

 

아니면 벤이 다른 곳에서 데려온 고양이일까요? 손목시계도 마찬가지로 그럴까요? 물론 종수는 해미의 것으로 여기지만, 영화는 그 진실을 직접적으로 말해주진 않습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적어도 해미와 관련된 것들은 정말로 존재하는지 아닌지 또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끝까지 확정짓지 않습니다. 단지 여러 중첩된 현실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인간 이전의 자연이 지녀왔던 도덕 즉 <자연의 도덕>이라고 극 중 대사에서도 표현됩니다.

 

다중 우주 또는 평행 우주가 있다면 멀리 갈 게 아니라 이 영화 버닝의 단순 서사 안에서 찾아도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단순 서사의 줄거리임에도 이토록 복잡한 중첩으로 보이게끔 만들어놓은 영화도 드물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인셉션이 떠오르지만 이 영화는 인셉션과도 다른 차원에서 이를 끌어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 버닝은 오히려 <단순함 속에 깃든 복잡스런 이율배반적 공존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정말 단순해지려면 결국 뭔가를 태워야만 합니다.

 

사실 등장인물들부터가 대립적이고 이질적인 세상을 사는 이들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며 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급적으로 보면 종수와 해미도 같은 것 같지만 이 두 사람도 정말 다릅니다. 척박하고 남루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살아가는 종수와 그런 현실로부터의 자유와 탈피를 꿈꾸는 해미, 이 둘 역시 삶의 방식 차이를 보여줍니다.

 

이런 다()중첩의 현실에서는 내가 선택한 결정이 되돌릴 없는 실체가 되고마는 현실이 됩니다. 다시 말해, 일을 도모하고 저지르는 사람이 결국 현실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영화 전체에서 무산계급 청춘의 분노 감정을 대변하고 있는 종수는 마지막에 실종된 해미의 환영을 보기도 합니다. 해미를 찾던 종수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결심합니다. 종수의 남루한 세상에선 결국 부자청년 벤이 해미를 죽인 것으로 간주되며 벤에게 응당의 댓가를 치르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종수가 태워야 할 제물 곧 비닐하우스란, 오히려 벤과 벤의 포르쉐였던 걸로 보입니다. 이를 태우고 자신의 분노의 흔적들까지도 태우고 그토록 흐릿한 세상을 벗어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그럼 정말 해미는 죽임을 당한 것일까요? 아니면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말한 것처럼 실제로는 스스로가 그렇게 사라진 것일까요?

 

양자물리학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죽임과 살림의 상태가 동시적으로 공존한다고 얘기됩니다. 이 영화도 끝내 그 뚜껑을 열지 않기에 죽어있음과 살아있음이 함께 공존합니다.

 

그만큼 이 영화 버닝은 매우 독특한 영화로 제게 남아 있습니다. 찜찜함이 있는 영화라는 점에선 기억 속에서 태우고 싶은 영화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제게는 앞으로도 잘 태워지지 않을, 매우 독창적인 영화로서 아주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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