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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 기존 기독교의 죄와 구원 이해에 대한 반론

by mommics 2022. 5. 18.

영화 밀양 포스터

 

1. 신애, 삶의 제반적 고통을 해결하지 못한 채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여인

 

 우리의 죄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은 어떻게 고통에서 치유받을 수 있을까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이 코드를 기독교라는 종교를 통해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신애(전도연)는 계속적으로 배반의 세월을 살아온 아픔의 여인으로 나옵니다. 배반의 세월을 살아왔기에 가슴에는 억눌린 한()을 품고 살아가는 여자였습니다. 죽은 남편의 배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남편을 이해하고자 했고, 결국 죽은 남편의 고향이자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밀양으로 와서 어린 아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신애는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이 낯선 땅에서 어린 아들과 사는 자신의 나약함을 오히려 방어하고자 돈 있는 허세를 부리다가 그만 자신의 어린 아들이 유괴당하는 뜻밖의 수렁으로 빠지고 맙니다.

 

결국 어린 아들은 죽고 신애는 자신에게 있는 슬픔과 응어리진 한을 해결하지 못한 채 기독교라는 종교에 귀의합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는 그 아픔들을 해결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신애는 믿었던 그 하나님 즉 신(God)으로부터도 배반을 당한 것입니다.

 

교회 생활로 인해 한동안 마음의 평안을 찾은 것처럼 나왔지만, 이미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나오는 그 살인범 죄수 앞에서 정작 피해당사자인 신애 자신은 그 관계에서 애초부터 빠져 있음을 알고 치를 떠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면 다인가”
“도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인가?”
- 영화 <밀양> 극중의 대사들 -

 

 여기서 우리는 기존 기독교의 죄와 죄사함이라는 용서의 문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신(God)과 개인(I)이라는 <11 관계>에서 빚어지는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내 죄를 신께 자백하면 신은 내가 어떤 죄를 지었든 간에 한없는 용서를 해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진정한 죄사함과 고통의 치유

신과 나의 1대1 관계가 아닌 이웃까지 포함한 3자적 관계에서의 회복이어야

 

하지만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봅시다. 누군가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그 죄로 인해 고통을 받는 타자(Others)도 같이 발생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가해자의 죄(Sin)>가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피해자의 한(, Han)>도 항상 같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 존재는 관계망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적 사태에서 <가해자의 죄><피해자의 한>은 동전의 양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죄사함은 신과 개인의 11 관계가 아니라 신과 죄인과 그 죄로 인해 고통 받은 피해자인 이웃이라는 <3자적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합니다. 진정으로 그 죄와 죄사함이라는 것도 3자적 관계가 온전해져야 진정한 용서와 치유가 이뤄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신과 개인의 11 관계에서 죄사함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만일 그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관념적일 뿐이고, 실상은 아편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죄 짓고도 그저 기도로 고백만 하면 스스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죄사함을 받았다고 심리적으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궁극적인 문제 해결이 못되는 아편일 수 있음을 영화 밀양의 주인공인 신애가 기독교로 귀의하게 되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애는 자신에게 있는 고통스런 아픔들이 평안하게 잘 해결되었다고 교인들 앞에서 은혜스러운 간증체험 마냥 고백합니다.

 

 물론 많은 교인들도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화답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치유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신애 자신이 평안함을 찾았다는 교인이면서도 무심코 살인자의 딸이 거리에서 맞고 있는 장면을 보고도 이를 외면하고 지나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기존 종교가 주는 <평안>이라는 게 얼마나 얄팍한 허위임을 예리하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종교인이 다 그렇진 않더라도 적어도 이것은 신(God)과 나(I)와의 11 관계만 고려할 경우 이웃 타자는 쉽게 외면될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인 죄사함 즉 진정한 구원과 용서와 치유는 신과 나(I)라는 11 관계에서가 아닌 <신과 나 그리고 이웃이라는 3자적 관계>에서 현실화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GIO(God-I-Other)라고 부릅니다. 이 우주에선 <>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언제나 'GIO에서의 나'인 것입니다.

 

3. 밀양, 비밀스런 구원의 신비는 바로 늘 함께 붙박이로 있는 이 땅에서부터

 

 결국 자신의 아픔을 해결했다고 생각했던 신애는 오히려 자신이 신과의 관계로부터 배제되어 있고 버림받아 있었던 사실을 알고선 격분해합니다. 이제는 그 같은 허위들을 신에 대한, 기독교에 대한 증오와 반감으로서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은 결국 신애 자신마저도 병들게 하고 갉아먹는 행위였을 뿐입니다.

 

 사실 신애가 진정으로 치유받기 위해선 결국 살인자의 딸과도 화해해야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이를 거부합니다. 치유되지 못한 한()은 결국 정신 병리마저 낳습니다.

 

 가슴에 꺼이꺼이 박혀 있는 멍울진 슬픔과 한을 어디로부터 치유 받을 길이 없습니다. 신애는 신(God)과의 관계에서도 고통받고 있던 자신이 이미 배제되어 있음을 알고서 타인과는 끝내 화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치유자의 역할로서, 영화 제목 밀양이 품고 있는 뜻인 <비밀의 햇볕>Secret Sunshine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배역이 바로 항상 그림자처럼 신애 옆에 함께 있어준 종찬(송강호)입니다.

 

 종찬의 치유행위란 <언제나 곁에 있어줌>, 바로 그것입니다. 신애가 아픈 병실에 있을 때에도 모든 타인들을 거부했지만 그래도 종찬 만큼은 끝내 거부하진 않았음에서 아픔이 치유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희망을 보게 됩니다.

 

 여전히 신애는 살인자의 딸과도 화해하지 못한, 치유되지 못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비극적 결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그녀가 이제 다시 거울을 본다는 것은 여전히 지속되는 비극 속에 새로운 희망의 암시를 줍니다.

 

여기서 종찬은 그녀에게 거울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구원자의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영화 밀양의 극중 장면

 

 신애는 종찬에게 밀양이고 종찬은 신애에게 밀양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은 인간에게 밀양이고, 인간 역시 신에게 밀양입니다. 신은 그토록 인간을 사랑하기에 이 땅 밑바닥에 내려와 죽기까지 했던 분이 아니셨던가요.

 

 영화의 첫 장면은 하늘로 시작해서 마지막 장면에는 땅바닥의 질퍽한 개숫물을 보여주며 끝닙니다. 관념에서 현실로, 위에서 아래로, 신에서 인간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질퍽한 개숫물은 분명한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신애가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 그 거울 속의 내용입니다. 현재의 자신이 겪고 있는 질퍽한 고통을 올바로 직시한다는 것. 그것은 진정한 치유와 구원의 출발일 것입니다.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우리 안의 모든 고통과 아픔의 현장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죄로 인해 발생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의 온전한 치유는 신과 나의 11 관계만이 아닌 신과 나와 고통 받는 이웃이라는 3자적 관계에서 언제나 고찰되어야 한다.

 

 애초부터 신께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온전한 죄사함과 구원의 치유란, 결코 관념적이거나 비역사적이거나 아편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언제나 현실적인 것이며, 온전한 치유를 지향하며, 이웃과 함께 더불어의 삶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4. 건강한 치유의 삶을 위한 영화 <밀양>이라는 텍스트

 

영화 <밀양>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고통 받는 이웃(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종교 신앙의 맹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 신앙이 아편적 신앙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마저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아편을 맞고도 치유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며, 그런 식의 아편적 치유는 기독교 외의 다른 데서도 엿볼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일컬어 "기독교에 대한 영화냐?"고 묻는다면, 저는 꼭 "그렇진 않다!"고 얘기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고통의 문제는 보편적이기 때문이며, 온전한 치유와 구원의 문제 역시 사람 사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고 구원의 문제가 있습니다. 영화 <밀양>은 그 지점에 단지 기독교를 배경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 흥미로운 생각을 해본 것은, 만일 신애가 교회를 찾아가지 않고 불교에 귀의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불교 역시 고통의 해결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교 또한 그 안에 관념적인 요인들도 없잖아 있다고 보지만, 암튼 매우 흥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신애를 연기한 전도연의 연기는 정말 최고의 연기라는 표현도 무색하리만큼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본 누구라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기존의 주류 보수 기독교가 아닌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혹은 그러한 종교나 삶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영화 <밀양>이라는 수작이 더없이 반가울 것입니다.

 

영화 <밀양>은 하나님(절대자)과의 관계만 강조하는 그러한 관념적 종교 신앙(혹은 이런 유형의 모든 아편적 치유들)의 맹점을 지적하며, 진정한 하늘의 신과의 관계는 질퍽한 고통이 난무하는 땅의 현실을 붙박이로 사는 우리네 이웃과의 관계마저도 함께 내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땅을 딛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온전한 치유가 가능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고통의 현실에 늘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 그것이 곧 밀양(secret sunshine)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하늘이 아니라 두 발을 딛고 서있는 땅에 있다는 걸 '밀양'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
이창동 감독의 칸느 기자회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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